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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5일 화요일

'두려움'과 '편파'로 인해 유서 깊은 일본 영자지 뉴스룸에 불어닥친 한파

도쿄(로이터) ― 지난해 12월 재팬 타임스의 편집부 직원과 수십명의 기자들이 14층 복도에 새로 마련된 유리벽 회의실에서 긴급 회합을 하기 위해 모였다.

회의에 올라온 단일 안건은 뜨거운 쟁점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외국인 수천 명을 군 위안소에 강제 복무시킨 일과 강제 징용한 일에 대한 재팬타임스 편집장의 새로운 설명이었다.

예전에 재팬 타임즈지는 한국인 노동자를 "징용공"으로, 위안부를 "2차 세계 대전 전후 및 전시 일본 군대를 상대로 성행위 제공을 강요받은" 여성들이라고 해왔다.

그러나 일본서 가장 오래된 영어신문인 재팬타임스는 11월 30일에 게시된 5문장으로 된 편집자 설명에서 한국인 징용공을 단순히 "전시 노동자"로 설명했다.

또한, 재팬타임지는 "의사에 반하여 복무한 사람까지 포함, 전시 위안소에 복무한 여성에 대해" 위안부 여성의 경험이 다양한 관계로 "전시 노동자"로 설명한다고 밝혔다.

해당 용어는 일본 사회에서 마찰의 소지가 있으며, 한국 정부에서는 명백한 전시 (인권) 유린 피해자들이라고 주장하는 등 논쟁이 심한 주제이다.

이번 재팬 타임스의 편집인 변경 사항은 지난 10월 한국 대법원이 일본 몇몇 기업은 전시 강제 노역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한 이후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나왔다.

미즈노 히로야스 재팬 타임스 편집 국장은 당 12월 회합에서 직원들에게 두 가지 목표가 있다고 말했다. "반일 미디어"라는 딱지를 떼고 싶다. 또한, 일본 기업 및 기관으로부터 광고 매출을 증대하겠다.

일부 독자들은 이번 변경 조치가 일본의 전시 행위를 덮어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한편, 영어신문 매체의 그와 같은 표현을 시정하라고 극렬히 요구해왔던 국가주의 활동가를 비롯한 주요 보수층에서는 이를 두고 "영단"이라며 칭송하고 있다.

미즈노 편집장은 로이터와의 전자 메일에서 자신과 편집부 간부들은 "논란이 심하고 규정짓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 한층 객관적인 관점을 반영하도록" 자사 신문의 표현을 수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11월 30일 편집자 설명은 재팬타임스의 편집 방침이 변경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재팬타임스가 외부 압력에 굴복했다는 견해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덧붙였다.

재팬타임스는 일본에 대한 외국의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매체로 일본에서 뉴욕타임스와 한 뭉치로 배포되고 있고, 일본 내부에서는 다른 영자 매체의 비공식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뉴욕타임스의 관계자는 "양사의 편집작업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본지는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로이터는 수백 쪽에 달하는 사내 전자메일과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포함, 거의 수십 명의 재팬타임스 직원과 인터뷰를(대부분 보복을 두려워해 익명을 요구) 통해 이번 편집 방침 변경이 2017년 6월 영자지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반일


일부 미디어 비평가는 신문 구독률과 광고 수익 손실을 우려하는 일본 뉴스룸의 자기 검열이 문제라고 말한다.

과거 아베 신조 총리와 최고위 측근인 스가 요시히데는 위안부 여성과 후쿠시마 재난에 관한 기사와 관련 진보 아사히 신문을 특정해 비판했었고, 그중 일부 기사에서는 오류가 있다며 추후에 번복되기도 했다.

스가 관방장관은 재팬타임스의 경우를 포함, 미디어 기업의 편집 정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일본 보수 단체는 그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행위에 관한 표현을 변경할 것을 강력하게 제기해 왔다.

위안부 소녀상에 대해 반일 정서를 부추긴다며 반대하는 한 호주계 일본 단체는 (잘 알려진 보수 평론가로 수십 년을 일본에서 근무했던) 켄트 길버트와 함께 아사히 신문에 대해 위안부 설명에서 "강제"란 표현을 빼라고 민원을 넣는다.

아사히 신문은 기사에 "가장 적합한 용어 사용"에 주의해왔다며 단어를 변경하지 않았다.

2014년 요미우리 신문은 영어판 기사에 위안부를 일컬어 "성 노예"란 표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비슷한 압력을 받고 독자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은 영문 사이트에 "요미우리 신문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라는 성명서를 게시했다.

뉴스룸에 번지는 찬서리 효과는 종종 조직 내부에서 기인한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언론 검열을 연구하는 벳푸 미나코 호세이 대학 언론학부 교수는 "직접적인 정부 압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상부나 여론에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너무 심한 비판을 하지 말자.'라거나 '조금 수위를 낮추자' 뭐 이런 식이다."

12월 3일 직원 회합에서 미즈노는 이번 변경이 정치적인 판단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녹취록에 보면 "재팬타임스는 반일이라는 딱지를 떼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결정으로 광고도 유치하게 될 거라고도 했다. 당시 후원사 콘텐츠 책임자였던 한 간부는 아베 신조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해 매주 기고해왔던 일본 템풀 대학교 제프 킹스턴 교수가 하차한 이후 아베 총리와의 단독 회견도 실현되고 정부 광고 매출도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저널리즘 측면에서는 치명적인 것 아니냐"라는 반응도 나왔다.

25일 한국 외교부는 성명을 통해 "일부 일본 언론기관이 군대위안부 희생자와 징용 관련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용어를 채택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라고 밝혔다.

12월 로이터는 남한 위안부에 관한 11월 22일자 기사에서 "성노예"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항의 서한을 받았다.

로이터는 해당 용어가 자체 스타일북 지침에 위배되는 관계로 삭제했다. (이곳)

새 주인


1897년 창립한 재팬타임스의 발행 부수는 4만5천 부 정도이다.

"두려움과 편파성이 없는 뉴스"라는 기치 아래 발행되던 신문사는 수년간의 적자와 전 주인 사망 이후 2017년에 광고 회사 News2u에 매각되었다.

신문의 편집 기조를 새로운 경영진이 변경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므로 독자들이 미묘한 변화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회사 매각 이후 몇 달 만에 킹스톤를 비롯해 일부 오랜 기간 상설칼럼을 게재하던 일부 기고가의 글이 배제된다는 통보를 받는다.

"난데없이 '우리는 당신의 칼럼을 마감합니다.'라고 적힌 전자 메일을 받았다."라고 킹스톤은 말한다.

미즈노는 앞으로도 킹스톤의 글을 받겠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상설칼럼이 취소된 이유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는 "일본 정부 비판이 타당한 경우에는 논평 작가나 칼럼리스트를 존치해왔다."라고 전자 메일에 적었다.

몇몇 기자들도 더 많은 편집 압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미즈노 취임 얼마 후) 2017년 8월, 도쿄 신문은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 도지사가 관례를 깨고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추모글을 생략한 것을 두고 "배타주의 조장 공포"라며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미즈노가 "이 사건을 보도할 가치가 전혀 없다"라는 의견을 기자들에게 밝혔을 때 특히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로이터는 해당 이메일 내용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신속한 변경


그리고 몇 달 후 미즈노 씨는 편집국 간부에게 과거의 재팬 타임즈에 게재된 기사에 자신의 의견을 참고로 명기한 100페이지 이상의 자료를 배포하고 위안부 설명에 관한 '개정안'을 제시했다.

로이터가 육안으로 확인한 자료를 보면 미즈노는 위안부를 "피해자"로 칭하거나 위안부에는 소녀도 포함된다는 언급에 대해 반대했으며, "참혹"했던 한국 강점기란 표현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로이터를 비롯한 통신사의 보도나 기사가 대게 "친한(親韓)"적이고, 일본의 견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역사가도 아니고, 역사의 증인도 아니며, 재판관도 아니다."라고 그는 적었다.

결국에 그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문제는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10월 한국 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의 신속한 비판과 함께 무수한 보도가 뒤따랐다.

미즈노는 전면적인 변경을 위해 재팬 타임스 편집부 간부들과 이사회로 발길을 옮겼다고 직원들은 전한다.

그즈음에 극우 싱크 탱크인 국가기본문제연구소는 특히 재팬타임스를 비롯한 영자 매체에 대해 한국의 소송 사건 원고를 부를 때 강제성을 제외한 "전시 노동자"로 지칭하라고 요구한다.

2주 후 문제의 편집자 설명이 재팬타임스에 등장했다.

포와로 탐정의 번역 © 무단복제나 전재를 금지합니다.

↪️원문 보기: 'Fear' and 'favor' chill newsroom at storied Japanese paper

2018년 5월 29일 화요일

나치 선동꾼을 전쟁 범죄자로 기소한 뉘른베르크 재판소와 미디어의 역할

지금도 계속되는 미국의 중동 침략은 현대 사회 안에서 대중 매체의 역할에 대한 가장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라크 침공의 길목에서 미국 언론은 이라크 공격을 위해서라면 거짓말, 왜곡, 반 진실에 기초한 부시 행정부의 주장을 무 비판적으로 내보냈다. 보도 매체는 대규모 반전 시위에 관한 뉴스를 전혀 보도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비판적인 견해를 사실상 배제했다. 또한, 백악관과 국방부의 선전과 배치되는 그 밖의 사실 뉴스도 마찬가지다.

매체의 목표는 분명하다. 여론을 조작하고 허위 정보를 유포함으로써 미 정부의 전쟁 정책에 반대하는 미국 내 수천만의 미국 사람들을 작고 무력한 소수자로 각인하기 위함이다.

지금은 큐 신호가 떨어진 듯 순종적인 미국 매체는 시리아에 관심을 돌렸다. 미군의 다음 표적임이 분명하다. 백악관과 국방부의 초점이 북한이나 이란으로 옮겨져야 한다면 그들 정권이 제기하는 미국 국민의 안전에 대한 위중한 위협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할 것이다.

미국 미디어에는 중동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관한 진지한 분석이 거의 없다. 미국 미디어는 전통적으로 "제4 계급"란 이름에 걸맞는 비판적 장치를 수행하거나 대중을 교육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일말의 책임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예로 감시견 기능이나 정부의 권력 남용과 사실 변조에 대한 견제 기능이 없다. 대신에 미국의 지배 계급이 할당한 기능을 노예처럼 실행에 옮긴다. 바로 미국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고, 공포에 떨게 만들고 협박해서 워싱턴 우파 도당의 반동적인 계획에 저항할 여지를 줄이는 역할이 미디어에 할당된 기능이다.

텔레비전 네트워크와 주요 신문은 미국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뉴스와 정보의 주요 원천이다. 그러나 이들 공공 자원은 거대 기업의 손에 맡겨져 있고 그들의 이익과 재산을 방어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엄청나게 부유한 개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수천 명의 시체 혹은 필요하다면 수백만 명의 이라크인, 시리아인, 이란인 등은 미디어 억만장자들의 입장에선 미국의 군사 및 경제적 세계 지배력을 달성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작은 대가에 불과하다.

그런 관계로 미국 미디어는 이라크에서 수행되었던 범죄 사실 전후에 액세서리가 되었고, 그 밖의 중동이나 전 세계 사람을 상대로 한 미래 범죄에도 액세서리가 될 뿐이다. 황폐해된 이라크 도시와는 동떨어진 잘 차려진 중역 회의실에 앉아 있는 미디어 거물들은 그런 혐의에 절대 직면하지 않는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의 역사적 선례나 유사 사례가 있다.

뉘른베르크 선례


선전과 선동꾼의 역할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당 지도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소집된 뉘른베르크 전쟁 범죄 재판소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다. 연합국 정부가 조직한 기관인 전범 재판소는 전범 국가의 지배 계층에 대한 최종 분석을 제공한다.

그렇긴 하지만, 미국 검찰은 대학살 관련 반세기 동안의 국제 경험에서 기인하는 민주적 법리를 내세웠다. 침략 전쟁의 계획과 개전은 범죄 행위에 해당하며 선전 노력을 통해 그런 전쟁 준비를 도운 자는 전투 계획을 작성하거나 군수품을 제조한 자 만큼이나 죄가 인정된다.

나치 신문과 라디오 선전의 주요 책임자였던 한스 프리츠셰에 대한 공소 제기는 특히 의미심장했다. 프리치셰는 1900년 베스트팔렌 보훔에서 태어나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군대에서 복무했고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지만, 학위없이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는 나치를 포함한 우익 "국가"당을 지지하는 신문사 체인인 휴겐 버그 프레스에서 언론인으로 근무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프리츠셰는 1932년 9월 정치 사건을 논하는 "한스 프리츠셰가 말한다"라는 주중 프로그램에서 라디오 논평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프란츠 폰 파펜 정권은 그를 정부 기관인 무선[라디오] 뉴스 부장으로 임명했다. 프리츠셰는 대개 나치주의에 동조했지만, 나치당의 당원은 아녔다.

히틀러 교도들은 라디오를 중요한 선전 도구로 보았다. 나치가 정권을 잡던 1933년 1월 30일 저녁에 장래에 대중계몽선전부 장관이 되는 요제프 괴벨스의 밀사 2명이 프리츠셰를 예방한다. 프리츠세는 모든 유대인과 나치당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한 모든 사람에 대한 즉각적인 해고를 포함하여 괴벨스에 의해 설정된 특정 조건을 거부했음에도 무선 라디오 부서의 책임자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 법정은 프리츠셰에 대한 공소제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프리츠셰는 당시 현존하던 국가사회주의 연합 정부였던 나치당 시절에 라디오 방송을 제작했으며 그는 나치당을 지지했다."

1933년 4월 괴벨스는 프리츠셰를 개인 방문했을 때 1933년 5월 1일 자로 새로 설립되는 대중계몽선전부 관할하에 무선 뉴스 서비스를 배정하겠다는 결정을 프리츠셰에게 알렸다. 첫 회동 결과에 만족한 괴벨스는 두 번째 회동 자리를 마련하고 그 자리에서 프리츠셰는 무선 뉴스 서비스를 "개편하고 현대화"하기 위해 단행한 조치를 괴벨스 선전부 장관에게 알렸다. 그 조치에는 유대인 직원을 해고하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괴벨스는 곧바로 독일 선전부의 통제하에 독일의 모든 뉴스 서비스를 재편성하고 현대화하기를 원한다고 프리츠셰에게 알렸다. ... 그는(프리츠셰) 괴벨스의 정신이 깃든 무선 뉴스 서비스의 재편을 마쳤으며, 1933년 5월 1일에 나머지 직원들과 함께 대중계몽선전부에 합류했다. 같은 날 프리츠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합류하여 지도부에 대한 전형적이고 조건없는 충성을 맹세했다."

선전부에 들어선 프리츠체는 "독일 언론부"를 위해 일했다. 1933년부터 1942년까지 프리츠셰는 선전부에서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가 독일 언론부를 이끌던 4년 기간에 나치 정권은 이웃 국가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었다. 뉘른베르크 검찰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독일 언론사의 기능 덕분에 독일 언론은 독일인의 마음과 심리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를 상대하는 외교 정책과 심리적 전쟁의 수단으로써 나치 공모자들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도구가 되었다."

프리치셰의 진술서에 따르면 : "1933년에서 1945년까지 전체 기간 내내 신문사를 감독하는 것이 독일 언론부의 임무였고 이 부서가 독일 지도부의 수중에서 효율적인 도구가 되도록 해주는 지침을 신문사에 제공하는 것도 역시 독일 언론부의 임무였다. 2,300개 이상의 독일 일간지가 독일 언론부의 통제를 받았다. ... 독일 언론부의 책임자는 모든 독일 신문의 대표하는 인사들을 상대로 기자 회견을 매일 개최했다. 거기서 나온 모든 지시는 언론 대표에게 전달된다.

공소 사실: 침략 수단으로서의 선전


미국인 드렉셀 스프레처가 제기한 기소건을 보면 히틀러 정권이 침략 전쟁을 준비하고 수행할 수 있게 해준 미디어 선전의 역할에 상당한 방점을 두고 있다. "나치의 공모자들이 심리전을 활용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신속성에 기초한 몇 가지 예외적 경우를 빼고는 주요 침략에 앞서 희생 상대를 약화하고 독일 사람들이 독일의 공격을 심리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계산된 대언론 캠페인을 시작했다. 독일의 전쟁 초기 승전 이후 외국 정치에 영향을 확대하고 후속 침략 전술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도 매체를 이용하였다.

프리치셰는 그의 전임자인 알프레트 잉게마르 베른트의 "초보적인 군과 같은" 수법 이후 1938년 독일 언론부의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언론에 대한 독일 국민의 신뢰성에 현저한 위기"가 조성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검사는 독일 미디어가 다양한 외국 침략 행위와 관련해 프리치셰의 직속 감독 아래 채택한 선전 캠페인을 상세히 설명한다. 예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편입(1939년)과 폴란드(1939년)와 유고슬라비아 침공(1941)을 사례로 들 수 있다.

폴란드 침공에 앞서 나치 언론의 선전을 보면 폴란드 내부 독일 소수자의 불만을 조장하거나 조작하는 내용이 있다. 프리치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선전과 관련해 독일의 주요 신문은 소위 '일일 지도(daily parole)'이라고 전달받은 지시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보도를 크게 강조했다. (1) 폴란드 현지 독일인 대상 잔혹한 테러와 독일인 말살; (2) 폴란드 현지 수천 명의 독일 남성과 여성의 강제 노동; (3) 노역과 무질서의 땅 폴란드; 폴란드 군인들의 탈영; 폴란드의 인플레이션 확대; (4) 폴란드 정부의 지시에 따른 국경 충돌의 도발. 폴란드 사람들의 정복 야욕; (5) 체코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폴란드의 박해"

유고 슬라비아 사건을 둘러싼 나치 선전과 관련해 뉘른베르크 재판 검사는 "관행적인 합리화, 거짓, 선동과 위협, 희생자를 분열시키고 약화하려는 통상적인 노력"에 주목했다.

프리치셰는 1941년 6월 소련 침공 직전에 어떻게 명령을 받았는지 설명한다. "[외무부 장관 요아킴 폰] 리벤트로프는 소련을 상대로 한 전쟁이 바로 그날 시작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통보했으며, 소련에 대한 전쟁은 조국의 수호를 위한 예방 전쟁으로, 독일에 대한 소련의 공격의 즉각적인 위험을 통해 우리에게 강요된 전쟁으로 전달할 것을 독일 언론에 요구했다. 독일의 침략 전쟁이 예방 전쟁이라는 주장은 나중에 독일 신문을 통해 반복되었는데 그건 제국 언론의 총장의 통상적인 일일 지도에 참석 중이던 나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나도 내 정규 방송에서 전쟁의 원인에 대해 그런 내용으로 전달했다."

따라서 외국의 불법 침략에 대한 "예방" 또는 선제공격 전쟁이란 말은 부시나 체니 또는 럼즈펠드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프리치셰 기소건은 오늘날 상황에도 대단히 관련성이 깊은 문제를 제기해 준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도록 만들고, 실제로 전쟁 범죄를 독려하는 나치 미디어 선전의 역할이 그것이다. 기소장 내용: "프리치셰는 잔악 행위를 선동하고, 무자비한 점령 정책을 독려했다." 난치 공모자들의 무기 역할을 한 선전의 결과는 나치 음모의 모든 측면에 녹아들어 있다. 점령 국가에서 잔학 행위 및 무자비한 착취도 그런 사례이다. 많은 일반 독일인들이 상시적인 나치 선전에 휘둘리지 않고 자극을 받지 않았다면 유럽 전역에서 자행된 잔학 행위에 결코 참여하지 않았거나 용인하지 않았을 수 있다. 잔학 행위를 실제로 자행한 사람들의 냉혹함과 열의는 프리치셰와 그의 업무 관련자들이 끊임없이 파고드는 선전의 영향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날 미국 언론은 60%~70%의 인구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여론조사를 보도한다. 그런 여론조사는 사상의 사회적 기반 확대라는 목적과 이해관계가 없는 단체가 실시하지 않았다. 면담자가 선택되고 질문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여론조사 결과를 얻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 있는 권세가들은 대통령과 군대 뒤에 단결된 국가라는 허구를 유지하는 일에 비상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에 대한 적개심과 전쟁 반대 여론이 널리 퍼져 있다. 부시 행정부는 언론에서 민주당이나 미국의 공공 기관에서 발언 기회가 없어졌다.

그렇지만, 인구의 저변 깊숙한 곳에는 전쟁에 찬성하는 유권자층도 있다. 거의 모든 전쟁에 찬성하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우익 광신도를 도외시하더라도 이라크 공격에 찬성했던 그들의 동료 미국인의 적지 않은 부분은 이렇게 믿는다. a) 사람 후세인 정권이 뉴욕시나 워싱턴에 대한 2001년 9월 11일 공격을 거들었다. b) 이라크인들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미국이나 이웃 국가에 대항할 목적으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 그 밖에도 c) 이라크 사람들이 미국의 힘을 빌려 "해방"되길 원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 기사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세 가지 주장은 모두 전쟁 발생 그 자체로 거짓으로 판명되었으며, 앞으로 사건의 전개 양상에 따라 거짓이 추가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이 이라크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모든 비극적인 결과에도 이러한 주장을 믿는다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설명해야 할까? 이는 수개월, 심지어 수년에 걸친 (1차 걸프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 미디어의 "끊임없이 파고드는 선전"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 미 미디어의 성공적인 여론 조작은 전쟁 범죄에 동조한 죄과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에 속한다.

프리치셰 기소 검사의 결론을 폭넓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결론은 더 이상 미국 지배 계층 내에서 중요시되지 않는 감각인 나치 전범들을 추적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 감각뿐만 아니라 현대 시대의 언론의 역할에 대해 상당히 구명(究明)하였다.

"프리치셰는 포고령에 서명한 공모자의 유형이 아니며 전반적인 거대 전략을 짜는 내부 자문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도 아니다. 선전의 기능은 대부분 그러한 전략 설정의 영역과는 별개이다. 선전 기관의 기능은 광고 대행사 또는 홍보 부서와 다소 유사하다. 광고 대행사 또는 홍보 부서의 임무는 제품을 판매하고 해당 기업이 시장을 점유하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나치 음모 세력이다. 사기를 수단으로 하는 음모에 있어서, 공모자 그룹의 영업 사원은 모든 기본 전략의 수립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것이 아니라 이 전략의 실천을 현실화하는 일에 집중했지만, 마스터 기획자만큼이나 중요하고 처벌 대상이다. 이 공소건에서 선전은 나치 음모에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무기였다. 게다가, 선전 선동가는 이 음모에서 주요한 공범자였다. 그리고 프리치셰는 그들 중 하나였다.

프리치셰는 독일 신문 기자단의 지도부에서 추락했던 전임 베른트 (Berndt)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았다. 그가 추락한 까닭은 부분적으로 그는 수데텐란트 선전을 무분별하고 과도하게 손질했기 때문이다. 프리치셰는 독일 사람과 편집자 모두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더 많은 기술과 정교함을 동원해 직무를 수행했다. 괴벨스가 말했듯이, 그가 "나라 전체의 귀를 종끗 세우게 하는" 그의 영민함과 믿음을 주는 능력이 그를 공모자보다 유용한 종범자로 만들었다…

"프리치셰는 자유 언론인으로서 피고석에 선 것이 아니라 독일인에 대한 나치의 속박을 옥죄는 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선동가로서 피고석에 선 것이다. 그는 공모자 집단의 과당한 요구를 독일 국민의 구미에 맞도록 만들었다. 그는 독일 나라 전체에 분노를 조장하고 사람에 대한 범죄를 교사(敎唆)했다. 프리치셰의 선전을 들은 독일인들에게 그 사람들은 인간 이하였다.

"나찌 국가의 선전기구가 없다면, 세계는 당시의 대참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나찌 공모자들과 그들의 기만적이고 야만적인 관행을 대신한 프리치셰의 역할 때문이며 그가 전에 국제 군사 재판소에 불려나와 추궁을 당하는 이유이다."

재판소는 프리치셰가 나치 정권이 추진한 선전 운동을 공식화하거나 발족시키기에 충분한 위상을 갖지 못했다는 의심스러운 근거에 따라 유죄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또한 프리치셰가 유대인 말살에 대해 알았거나 그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뉴스를 전달했다는 점을 검찰이 증명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프리치셰는 즉시 체포되어 독일 법원에 의해 여러 가지 범죄로 기소되었으며 1950년에 강제 노역 9년 형을 선고받고 1950년 감옥에서 석방되었으며 3년 후 암으로 사망했다.)

검찰은 피고인 프리치셰의 "근거없는 석방" 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그들의 주장을 끈질기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검찰은 본 평결이 프리치셰가 "그의 말대로 1942년까지 실질적인 독일 언론의 감독자였으며 결국 1942년에 그가 '독일 라디오의 사령관'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검찰의 지적은 계속된다. "한스 프리츠셰 피고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성격 규정을 위해서는 히틀러와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예로 괴링과 같은)이 일반적인 선전과 특히 라디오 선전에 상정한 중요성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침략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로 판단된다."

히틀러의 독일에서는 평결에 대한 반응이 계속되고 있다. "선전은 침략 행위를 준비하고 수행하며 독일 대중을 훈련하여 독일 파시즘의 범죄 기획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요인이었다. ...

"나시 선전 활동의 기본 방식은 거짓 사실 발표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노골적인 거짓말의 보급과 체계적 여론 기만은 군 병기의 생산과 군사 계획의 초안 작성 만큼이나 히틀러 무리가 그들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출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의 철저한 침탈의 토대 위에 세워진 선전이 없었다면 독일 파시즘의 침략 의도를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며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인 범죄를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 국가의 선전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일간지와 라디오가 있었다."

이 선고 이유에 추가할 것이 거의 없다. 모든 유사한 역사의 반복을 논하는 데에 제한이 있게 마련이지만, 독일 언론 매체에 대한 전쟁 범죄 기소장은 현대 사회의 시사 문제에서 미국 언론 권력의 역할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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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The Nuremberg tribunal and the role of the media  WSWS.ORG

2018년 4월 30일 월요일

노벨 평화상 수상자 오바마 2016년에 26,000개 폭탄 투하

미카 젠코 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과 국가 안보 전문가인 제니퍼 윌슨 외교협회 연구원이 추산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에 26,000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시리아는 12,192개의 폭탄을 맞았는데, 이는 오바마의 폭격 대상 국가 중에 가장 높은 수치다. 간발의 차로 2위가 된 이라크는 12,095개의 폭탄을 맞았다. 오바마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작년에 7개국을 상대로 모두 합쳐 최소 26,171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젠코와 윌슨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추산치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작년 한 해 임기에만 7개 국가에 26,171개 폭탄을 투하했다. 이 수치는 파키스탄, 예멘, 소말리아, 리비아에 대한 공습 데이터만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로 제공된 것을 고려할 때 의심할 바 없이 낮게 평가된 것이다. 국방부의 정의에 따르면 1회 '폭격'에는 다수의 폭탄과 탄약이 관여되어 있을 수 있다. 2016년에 미국은 2015년보다 3,027개 더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 그리고 이는 리비아가 공습 대상 국가로 하나 더 추가된 결과다.

젠코의 2015년 추산치는 낮았었다. 그는 2015년은 2016년에 비해 거의 3,000개가 적은 23,144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고 추산했다. 이는 폭격 대상은 변함이 없지만, 선진 무기 사용에 관해서는 오바마의 방아쇠 행복이 급격히 증가했음을 말해준다: 2015년 투하된 폭탄 대다수(22,100건)가 이라크와 시리아에 떨어졌다.

평화상 수상자 대통령이 7개국 이상에 이렇게 많은 폭탄을 터트릴 수 있었으니 우리는 모두 앞으로 있을 폭격은 어떨지 매우 우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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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및 참조 링크

  1. A Nobel Peace Prize Winner Dropped 26,000 Bombs in 2016 AntiMedia
  2. Donald Trump Is Dropping Bombs at Unprecedented Levels Foreign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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